주님과 함께 죽고 살겠다는 사나이

주님과 함께 죽고 살겠다는 사나이
사도 14,19-28 / 요한 14,17-31r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는 돌을 맞아
죽은 사람처럼 되어 밖에 버려졌다.

그런데도 제자들이 둘러싸자 다시 일어나
전도여행을 계속하며
복음을 전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죽은 줄 알고 버릴정도로 맞았으면
적어도 며칠이라도
몸을 추스를 시간이라도 필요했을 텐데
무엇이 그를 그리 멈추지 않고 달려가게 하였을까?

무엇이 그에게 죽음의 목전까지 가서도
벌떡 일어서게 하고
일어서자마자 자신의 안위는 아랑곳없이
말씀을 전하는데 매진케 하였을까?

조금만 피곤해도 쉴 시간을 필요로하고
아픈 곳이 있으면 자꾸 신경이 쓰이고
맞게 되면 그곳을 피해서 달아나는 것이 우리인데

바오로 사도는 물불 가리지 않고
적진 아군 가리지 않고
죽을 구덩이인지 살 길인지 가리지 않고
그저 달려가서 복음을 전할 일만 생각한다.

예전에 그리스도인을 잡아들이기 위해
온갖 방법 가리지 않고 혈안이 되었던 그가
이제는 물불 가리지 않는
위험천만한 삶을 살고 있다.

잡아 들였던 그가
이제는 잡혀가는 신세가 되었고
호령하던 그가 이제는
호소하는 자로 살고 있다.

흔들림없는 이 열정의 사나이 안에
가득 찬 사랑과 확신이,
주님이 가득 채워 주신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가
그를 그리 무모하게 내달리게 하고 있다.

그는 확신과 믿음에 가득 차 말하고 있다.
‘주님, 저는 산란해 하지도
겁을 내지도 않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당연히 저도 당신과 함께 죽고
살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 Veronica Yang. 5.12.2020-

‘하나 됨’의 길을 따라

‘하나 됨’의 길을 따라
요한 14,1-12

제자들은 길이신 예수님께
길을 가르쳐 달라고 하고
하느님 아버지와 하나이신 분께
아버지를 뵙게 해달라고 한다.

늘 거리를 두고, 나누고
늘 우리 자신만을 찾는 우리에게
주님의 이 하나 됨의 말씀은 낯설기만 하고
좀체로 이해하기가 힘들다.

내 어릴 적만 해도 함께 사는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웠다.
나이드신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살고
결혼하면 시댁 부모님과 사는 것이 당연했고
딸린 가족들까지 챙기고
자식들을 챙기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그러는 와중에 할머니는 구걸하시는 분들
산을 넘어다니며 행상하시는 분들
연극을 하며 오랫동안 머물며 약을 파시는 분들
심지어 나병환자들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여
밥을 먹이시고
좁은 방안에 자리를 좁혀
재워주시는 것을 자연스럽게 하셨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물질문명이 우리 삶을 지배하면서
더 이상 함께 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고
당연하지도 않게 되었다.
오히려 불편한 장애물로 여기게 되었다.

서로 간에 넘어오지 못하도록 장벽을 쌓고
나만의 공간을 지키려는
울타리가 너무도 분명한 우리에게
예수님의 이 하나 됨의 말씀은
알아듣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불편하기 그지없게 다가온다.

아버지와 온전히 한 몸을 이루시고
한 뜻을 이루신 주님께서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안에 있고
서로가 서로를 보여주고 있다고 하신다.
우리와도 이 하나 됨을 통하여
아버지 안에 사는 자녀로서
아버지를 품고 증언하기를 열망하신다.

요즘 코로나19로 인해서 힘들어하면서도
하나 됨을 통하여 이 난관을
극복해보고자 하는 이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다.
어쩌면 잠시 잊고 있었던,
일상의 힘듦과 바쁨이라는 창고에 밀쳐 두었던
우리 안의 ‘하나 됨’의 선한 본성이
다시 일깨워지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주님께서는 이런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내가 네 안에 있고
네가 내 안에 있다는 것도 믿어라.
그리고 네 이웃 안에도 내가 있음을 믿어라.

내 피가 흘러 모든 이 안에 흐르고 있고
내 살이 양식이 되어 모든 이 안에 살고 있기에
너희는 모두 내 안에 하나다.

그러니 너희들은 서로 자꾸 남이라고 하지 말고
둘이라고 하며 나누려 하지 말라.”

  • Veronica Yang. 5.10.2020-

스스로 길이 되신 분

스스로 길이 되신 분
사도 13,26-33 / 요한14,1-6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보내어 진자로서의 당신의 신원을
오늘은 길이라는 비유로 말씀하신다.

아들과 아버지가 나뉘어 질 수 없듯이
하느님 아버지와 늘 함께이면서
그분을 드러내고 계시는 주님을 앞에 두고도
제자들은 알아보지 못하고 묻고 있다.

길 위에서 서 있으면서도
그 길이 어디 있는지 묻고 있고
그 길이 진리로 이끌고 있음에도
진리가 무엇인지 묻고 있으며
생명의 샘물을 눈앞에 두고서도
목마르다고 하고 있다.

세례자 요한이 길을 닦는 이라면
예수님은 거기에 오셔서
스스로 길 자체가 되신 분이시다.

하늘과 땅을 잇고
창조주와 피조물을
아버지와 자녀를
용서해주시는 분과 죄인을 이어주며
밟히고 파헤쳐지면서도
기꺼이 등을 내어놓고 있는
길이 되셨다.

아무리 좋은 집이나 땅도
들어가는 길이 없으면 아무 쓸모가 없어
우리는 그것을 맹지라고 부른다.
맹지는 길이 아닌
타 지번의 토지로 둘러싸여 있는 땅이다.

세상의 것에 귀가 멀고 눈이 가리워서
알아듣지 못하고 쉽게 산란해 하는 우리에게
주님은 말씀하고 계신다.

‘맹지를 찾지 말고
생명으로 이끄는 길을 찾아라.
내가 바로 그 길이다.

아무리 값진 보화가 있다 한들
아무리 뛰어난 지식이 있다한들
나를 알지 못하면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맹지일 뿐이다.

내가 너희를 위해 스스로 엎드려진
하느님께로 이끄는 생명의 길이다.
이 길을 밟고 이 길이 이끄는
아버지께로 나아가라.
그 길에 길인 내가 늘 함께 있다.’

  • Veronica Yang. 5.8 2020-

혼돈을 넘어 새 세상으로

혼돈을 넘어 새 세상으로
사도9,1-20 / 요한 6,52-59

바오로의 회개장면은 너무나도 강렬해서
많은 화가들이 한 번쯤은 도전해 보고 싶었는지
많은 그림들이 남아있다.

어제보다 더 드라마틱한 바오로의 회개장면은
하느님의 더 적극적인 개입하에 이루어진다.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들일 권한을 받아서
보부도 당당하게 길을 떠난 바오로.
그는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충실했던 신앙을 위해
정의감에 불타 물불 가리지 않고 덤비고 있다.

권한을 받아 신도들을 잡으러 가는 바오로
말에서 떨어지는 눈이 먼 바오로

그런 그를 하느님께서 치셨다.
부와 세상의 힘을 상징하는 말에서 끌어 내리시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내면을 이어주는
눈이라는 창문을 닫으셨다.

모든 것이 너무나 선명했던 바오로.
본인의 판단과 신념과 신앙,
그리고 하고 있는 사명도
결코, 그릇된 일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눈이 닫히고
확신을 갖고 달렸던 모든 것에서 내동댕이쳐지면서
갑자기 죽음같은 칠흑만이 내면을 가득채우고 있다.

깊은 혼돈 속에서 사흘을 굶고 있는 동안
하느님께서는 죽음 같은 그의 무질서 속에서
질서를 잡아가는 중이셨다.
보아야 할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위해,
철썩같이 믿고 있던 신념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하느님은 그의 현세적인 눈을
일시적으로 닫아 버리신 것이다.

죽음의 세례를 거쳐
참 자녀로서 부활케 하기 위해
주님은 당신의 강한 팔을 치켜드신 것이지만
그가 그것을 깨닫기 까지는 얼마나 충격적이고
두렵고 혼란스러웠을지 가늠조차 하기 힘들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가라는 하느님의 소리에
하나니아스는 얼마나 당황하고 기가 막혔을까?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아느냐고
얼마나 못된 짓을 많이 했는지 아느냐고
하느님께 되묻지만
결국은 명을 따라 사울에게 가서 치유의 안수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이 제자의 위대함을 보게 된다.
자신의 형제들을 죽이고
자신들을 잡아 죽이려는 이에게 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까마는
그는 가서 원수의 눈에 손을 대고
치유의 기도를 한다.

이 장면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
제대로 보게 된 이는 비단 바오로 뿐만이 아니라
하나니아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자신들의 경험과 사실과 확신을 넘어
하느님은 당신의 일을 하시고 계신다는 것을
둘 다 깊이 체험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하나니아스가 바오로에게 안수를 하다.
옛사람을 벗고(그림 아래 깨어진 갑옷) 주님을 선포하지만 사람들은 아직도 그를 옛사람으로 여겨 두려워한다.
복음선포자의 삶을 사는 바오로
하늘로 들려 올려지는 바오로 (탈혼)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라는 주님말씀처럼
이 사건으로 이 두 원수는 같은 형제가 되고
누구보다고 열성적인 사도가 되고
신앙의 동지가 되어 복음을 선포한다.

자신의 신념과 판단을 믿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을 수 있다는 것을 안 이 두사람은
주님께 온전히 의탁하게 된다.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라는 주님의 말씀대로
그들의 삶은 온전히
주님으로 인해 의미를 갖게 된다.

  • Veronica Yang. 5.1 2020-

주님께 이끌려지다.

주님께 이끌려지다.
사도8,26-40/요한 6,44-51

오늘 독서에 나오는 필리포스는
일곱 봉사자 중 한 사람으로서
박해를 피하여 사마리아로 가서
지중해 연안에서 복음을 선포한다.

예수님의 수난을 예언한 이사야서의 말씀을
필리포스가 설명해주자
칸다케의 내시라고 하는 이가 묻는다.
“내가 세례를 받는 데에 무슨 장애가 있겠습니까?”

각주에 보면 37절이 생략되어 있지만
2세기 이후,
서방에서 손으로 베껴 쓴 사본들에는
37절의 말씀이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마음을 다하여 믿으시면 받을 수 있습니다.”
하고 필리포스가 대답하자
“나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하고 그가 말하였다.」

오늘 이름도 없이
칸다케의 내시라고 명명된 이가
하느님의 자녀로 세례를 받기까지의 여정이
한 편의 영화처럼 드라마틱하게 펼쳐진다.

천사에 이끌려 내시에게 다가간 필리포스,
이사야서를 읽고 있는 내시,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고,
수레 위로 초대받아
예수님 수난과 관련된
그가 읽고 있던 대목을 설명해주고
마침내 물가에 이르러 내시는 세례를 청한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끝난 후
필리포스는 성령에 이끌려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오늘 하느님의 인도에 따라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난 익명의 내시처럼
우리도 하느님의 인도를 받지 않고서는
아무도 생명의 길로 들어설 수 없다.
스스로의 노력인 듯 하지만
이미 필리포스를 통해 내시를 구원하고자 하신
하느님의 계획이 미리 있었듯이
하느님은 우리의 원의와 작은 몸짓을 키워
생명을 주시고자 하시는 당신의 계획을 성취하신다.

그리고 당신께로 이끌어 온 사람들에게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생명의 빵,
영원히 부패하지 않고 지속 될 사랑을 위해
당신의 살을 떼어 양식으로 주신다.

예수님을 알고 기뻐하며
제 갈 길에 오른 익명의 내시의 모습은
주님께 이끌려진 후,
주님의 자녀로서 각자 사명을 부여받고
신앙의 길 위를 걷고 있는 우리일지 모른다.

주님,
오늘 그 길 위에서 저희를 이끌어 주신
당신을 기억하게 해주십시오.

당신의 살까지 떼어 자녀에게 먹이시는
펠리칸이신 당신의 사랑을 헤아리게 해주십시오.

그리하여 오늘 우리가 만나는 삶의 굴곡들 안에서도
기쁨의 환호 소리 드높이게 해주십시오.

  • Veronica Yang. 4. 30. 2020-
필리포스가 내시에게 말을 걸다
내시에게 이사야서를 설명하는 필리포스
필리포스가 내시에게 세례를 주다
필리포스의 전도여행

하느님의 사랑이 나를 재촉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나를 재촉합니다.
사도 8,1ㄱ-8 / 요한 6,35-40

스테파노의 죽음 후에
심한 박해가 지속됨에도 불구하고
믿는 이들은 흩어져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면서도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일을 멈추지 않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
며칠 전 낭독 된 바오로 사도의 스승이며
율법교사인 가말리엘의 말이 떠오릅니다.

“그들의 계획이나 말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도, 박해가 심해져도
믿는 이들의 수는 불어만 갑니다.
죽음을 감수하며 복음을 전하는데
여전히 용감합니다.

잠시 나타난 영웅들은 순간 군중을 현혹했기에
그들이 죽은 후 어려움이 닥치니
잠시 모인 이들은 다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이들은
죽음 앞에서도 멈추지 않습니다.
현세의 안전도
눈에 보이는 어떤 보상도
얻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무언인가에 이끌려
증언자의 길을 거침없이 달려갑니다.

그 대답은 오늘 복음에서 들려주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더욱 확실해집니다.

갖은 고난과 박해 속에서도
예수님은 계속 외쳤습니다.
죽음을 당하면서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부활해서도 항구히 보여주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보내주시면서
그 속을 뒤집어서라도 보여주고 싶어 하셨습니다.

아직도 믿지 못하고
그저 완고하기만 한 우리를 알면서도
단 한 명도 잃지 않고 살리겠다는
돈키호테 같은 꿈을 꾸고,
썩지 않는 영원한 생명 안에 함께 살날을 꿈꾸는
바보 같은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이
마음 깊은 곳에서 자꾸자꾸 뜨겁게 살아와
그들의 삶을 적시고 있었기에
증언자의 삶을,
사랑의 여정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우리 귀에 대고 나직이 들려주는
믿음의 선조들의 뜨거운 고백을 듣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나를 재촉합니다.”

  • Veronica Yang. 4. 29. 2020-

절규

절규
사도 7,51-8,1ㄱ /요한 6,30-35

독서에서 스테파노는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하느님을 믿는 이들에게 말한다.

그리고 주님의 오심을 예언한 예언자들을
줄곧 박해해 온 그들의 조상들과 같이
이제는 그들이 예언된 분을
배신하고 죽였다고 말한다.

이어서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듯
열린 하늘을 보고
거기에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다.”고 말하자
그들은 큰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았다.

그리고 끌고가서 돌을 던져 스테파노를 죽인다.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있는
백성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의 모습을 보며
에드바르 뭉크의 ‘절규’라는 그림이 떠오른다.

이 그림은 현대인의 내면의 공포와 불안을
잘 표현하고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열린 하늘과 영광스런 주님 현존의 소식에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을 만큼
그들이 피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하느님의 아들을 죽였고
지금 또 다른 살인을 앞두고
늘 신성모독이라며 하느님을 핑계삼아 정당화해왔지만
더 이상 묻혀 있을 수 없는 내면의 소리,
양심의 소리가 내는 절규를
듣지 않으려는 몸부림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그 절규를 무시한채
세상의 아성을 지키기 위한 길을 계속 간다.
그럴수록 그들의 내면의 불안과 공포는 커져가고
어느 순간 그들은 그 절규에 눌려
처참히 죽게 될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리고 죽기까지 이 살인자들을 위해 기도한 스테파노처럼
주님은 목을 뻣뻣이 세우고
주님께 맡겨놓기라도 한 듯이
무엇을 달라고 보채는 이들에게
끝까지 그들을 위한 빵으로 남아계신다.

괘씸해서 주려던 마음이 쏙 들어갈 듯한데도
주님은 여전히 마음과 귀가 닫힌 그들에게
‘내가 생명의 빵이다.
너희가 살길이 여기다.’라며
계속해서 우리 마음에 외치고 계신다.

그러나 아무리 소리를 높여도
눈앞에서 손을 휘저어대도
그들의 눈은 아직도 뜨일 줄 모르고 있다.

‘주님, 저희 마음과 귀를 열어주시어
애타게 부르는 당신의 소리를 듣게 해주십시오.
열심히 흔들고 있는 당신의 손을 보게 해주십시오.’

  • Veronica Yang. 4. 28. 2020-
나는 두 친구와 함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런데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었고, 나는 갑자기 걷잡을 수 없는 슬픔에 빠졌다. 나는 멈춰 서서 난간에 기댔다. 너무나 피곤했기 때문이다. 암청색 도시 위로 피가 불길처럼 날름거리고 있었다. 친구들은 계속해서 길을 갔고, 나는 두려움에 떨며 홀로 뒤쳐졌다. 나는 대자연으로부터 엄청난 절규가 끝없이 흘러나오는 소리를 들었다. -에드바르 뭉크

현상과 표징 사이에 걸터앉아서…

현상과 표징 사이에 걸터앉아서…
사도 6,8-15 / 요한 6,22-29

오늘 독서에서 스테파노는 백성 가운데서
큰 이적과 표징을 일으키고
논쟁을 걸어오는 이들에게
지혜와 성령으로 말합니다.

그러다 보니 감당하기 힘들다고 생각한 반대자들은
얼토당토않은 모함으로 그를 몰아세우지만
그럴수록 그의 얼굴은 하느님의 얼로 더욱 빛나
적대자의 눈에도 천사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이적 앞에서도
그저 현상만 볼 뿐입니다.

복음에서는
빵의 기적을 체험한 후
무슨 작전이라도 하듯이 무리를 이루어
예수님을 찾아 나선 이들에게
단지 현실을 충족해 준 현상만을 보고 있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표징을 보라고 촉구하십니다.

‘표징이란 사물, 현상, 행동들을 통해
심오한 의미를 전달하고자 할 때 사용된다.
그러므로 표징이란 본질적인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하나의 방식이라 할 수 있다.
표징에 있어 중요한 것은 표징 자체가 아니라
표징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이다.’(신약성경 용어사전)

반면 ‘현상’이란
감각으로 인지할 수 있는 대상을 말하며
현상을 나타내는 그리스어 동사 ‘phainesthai’는
‘보이다, 나타나다.’ 라는 뜻으로
지각되는 사물의 겉모습이 실제와 다른지
어떤지에 대해서 알려주지는 않습니다.
이는 현상만으로는 그 의미,
원천을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단지 빵이라는, 현실적 필요라는 현상에서 눈을 돌려
영원한 양식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는
하느님의 마음을 만나는 표징을 읽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현상을 보고 달려온 군중들처럼
우리는 자주 묻곤 합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 질문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싶으면서도
다분히 현상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현상과 표징,
이 세상 가치와 하늘나라 가치라는 중간에 걸터앉아
질문하고 있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
외아들까지도 기꺼이 내어준 아버지의 사랑을 보아라.
영원한 생명까지 주기 위해
다시 살아난 나를 보아라.
너희가 혼자로는 감당하기 힘들까 봐
성령으로 늘 함께하시려는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을 보아라.

십자가에 달린 내가 표징이고
부활한 내가 표징이고
성령이 바로 표징이다.

너희가 할 일은
아버지의 지극한 이 사랑을 믿는 것이다.”

주님, 오늘 저희가 당신께
‘무엇을 해야 합니까?’ 라고 묻기보다
구원의 역사에서 그 표징들이 가리키고 있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믿게 해주십시오.

  • Veronica Yang. 4. 27. 2020-

저희에게 말씀하실 때 저희 마음이 타오르게 하소서.

저희에게 말씀하실 때
저희 마음이 타오르게 하소서.
사도 2,14.22ㄴ-33 / 루카 24,13-35

오늘 독서에서 베드로는 사도들과 함께 일어서서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다윗의 말을 빌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로서
어떻게 구원의 역사를
계속 이끌고 가시는지를 설명합니다.

복음에서 두 제자가 걸어가고 있습니다.
부활한 예수님을 만난 여인들의 말을 듣고도
여전히 절망에 젖어 옛 생활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들 곁에 다가가 걷습니다.

제자들은 최근에 일어난 사실들을 말하고 있지만
사실 그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면서
사실이 아닌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절망에 매여 한쪽만 보면서
부활한 예수님을 본 증인들의 말은
간과하고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그리고 베드로가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하듯이
성경을 들어 차근차근 설명 해주십니다.
예수님도 베드로도 성경 말씀을 들어
구원 사건을 설명하십니다.

우리가 듣고 있는 예수님의 죽음에서
부활로 이어지고 있는 구원 사건은
갑자기 드러난 것이 아닌
오래전부터 계획된 하느님의 뜻이고 열망이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계획과
중단없이 계속되는 구원 여정이
성경 전반에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엠마오의 제자들처럼
우리 눈과 마음이 닫혀 있을 때는
없는 사실처럼 여겨집니다.

오늘 마음을 열고 눈을 열어
주님 말씀을 새롭게 들어봅시다.
듣고 싶지 않아서였든,
흘려들었든,
들으면서도 안 들었든 상관없이
오늘은 살아오는
생명의 말씀으로 들을 수 있도록
주님의 도움을 청해봅시다.

“주 예수님,
저희에게 성경을 풀이해 주소서.
저희에게 말씀하실 때
저희 마음이 타오르게 하소서.”

  • Veronica Yang. 4. 26. 2020-

하느님의 강한 손 아래에서…

하느님의 강한 손 아래에서…
1베드로 5,5s-14 / 마르 16,15-20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복음선포의 사명을
다시 확인시키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이 뒤따르게 하시고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고 계십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선포하고 기적을 행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느님께서 다 하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쭐댈 것도 자랑할 것도 아닙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일하시기 위해서
필요한 태도가 독서에 제시되고 있습니다.

“겸손의 옷을 입고 서로 대하십시오. ….
하느님의 강한 손 아래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겸손은 단순히 자신을 낮추는 것만이 아니라
상대를 존중하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하느님의 크신 사랑 앞에서
미약하기 짝이 없는 자신을 낮추면서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이 받은 선물을 발견하고
그에 대해 기뻐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단지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온전히 이뤄지도록
자기 뜻과 고집을 내려놓고
일상 안에서 섭리하시는 하느님의 섬세한 손길에
온전히 내어 맡기는 자세를 말합니다.

오늘 우리는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을 듣고 있습니다.
이는 다른 의미로
우리에게 끝까지 함께 하자는 초대이며
언제나 함께 있겠다는 사랑의 고백입니다.

오늘 경축하고 있는 마르코복음 사가는
복음을 선포하며 그 초대에 응답하였고
순교로서 그 사랑을 고백하였습니다.

이 초대와 사랑의 고백 앞에
우리는 어떤 응답과 고백을 할 수 있을까요?

영원히 함께하시겠다는 사랑의 고백을
제대로 음미한다면
아래의 시편 노래가
저절로 새어 나올 것입니다.

“주님, 당신 자애를 영원히 노래하오리다.”

  • Veronica Yang. 4. 25.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