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선교수녀회

혼돈을 넘어 새 세상으로

혼돈을 넘어 새 세상으로
사도9,1-20 / 요한 6,52-59

바오로의 회개장면은 너무나도 강렬해서
많은 화가들이 한 번쯤은 도전해 보고 싶었는지
많은 그림들이 남아있다.

어제보다 더 드라마틱한 바오로의 회개장면은
하느님의 더 적극적인 개입하에 이루어진다.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들일 권한을 받아서
보부도 당당하게 길을 떠난 바오로.
그는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충실했던 신앙을 위해
정의감에 불타 물불 가리지 않고 덤비고 있다.

권한을 받아 신도들을 잡으러 가는 바오로
말에서 떨어지는 눈이 먼 바오로

그런 그를 하느님께서 치셨다.
부와 세상의 힘을 상징하는 말에서 끌어 내리시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내면을 이어주는
눈이라는 창문을 닫으셨다.

모든 것이 너무나 선명했던 바오로.
본인의 판단과 신념과 신앙,
그리고 하고 있는 사명도
결코, 그릇된 일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눈이 닫히고
확신을 갖고 달렸던 모든 것에서 내동댕이쳐지면서
갑자기 죽음같은 칠흑만이 내면을 가득채우고 있다.

깊은 혼돈 속에서 사흘을 굶고 있는 동안
하느님께서는 죽음 같은 그의 무질서 속에서
질서를 잡아가는 중이셨다.
보아야 할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위해,
철썩같이 믿고 있던 신념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하느님은 그의 현세적인 눈을
일시적으로 닫아 버리신 것이다.

죽음의 세례를 거쳐
참 자녀로서 부활케 하기 위해
주님은 당신의 강한 팔을 치켜드신 것이지만
그가 그것을 깨닫기 까지는 얼마나 충격적이고
두렵고 혼란스러웠을지 가늠조차 하기 힘들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가라는 하느님의 소리에
하나니아스는 얼마나 당황하고 기가 막혔을까?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아느냐고
얼마나 못된 짓을 많이 했는지 아느냐고
하느님께 되묻지만
결국은 명을 따라 사울에게 가서 치유의 안수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이 제자의 위대함을 보게 된다.
자신의 형제들을 죽이고
자신들을 잡아 죽이려는 이에게 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까마는
그는 가서 원수의 눈에 손을 대고
치유의 기도를 한다.

이 장면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
제대로 보게 된 이는 비단 바오로 뿐만이 아니라
하나니아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자신들의 경험과 사실과 확신을 넘어
하느님은 당신의 일을 하시고 계신다는 것을
둘 다 깊이 체험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하나니아스가 바오로에게 안수를 하다.
옛사람을 벗고(그림 아래 깨어진 갑옷) 주님을 선포하지만 사람들은 아직도 그를 옛사람으로 여겨 두려워한다.
복음선포자의 삶을 사는 바오로
하늘로 들려 올려지는 바오로 (탈혼)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라는 주님말씀처럼
이 사건으로 이 두 원수는 같은 형제가 되고
누구보다고 열성적인 사도가 되고
신앙의 동지가 되어 복음을 선포한다.

자신의 신념과 판단을 믿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을 수 있다는 것을 안 이 두사람은
주님께 온전히 의탁하게 된다.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라는 주님의 말씀대로
그들의 삶은 온전히
주님으로 인해 의미를 갖게 된다.

  • Veronica Yang. 5.1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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